[중앙 칼럼] 17년 간격 두고 만난 두명의 조선족
1998년 4월 13일, 연변공항에서 '그'를 만났다. 웃음기를 띠긴 했지만 주름살 가득한 얼굴은 30대인지 50대인지 가늠할 수가 없었다. 갈색 바지에 낡은 점퍼를 입은 그의 뒤로 역시 낡은 볼크스웨건의 '싼타나'가 서 있었다. 조선족인 그는 이틀간 조·중 국경을 따라 나를 안내하기로 돼있다. 낡긴 했지만 자동차를 소유한 그는 어엿한 독립사업자로 그 사회에서 잘나가는 축에 속한 듯했다. 하지만 우린 말만 겨우 통할 뿐 서로에 대한 이질감은 적지 않았다. 당시 나는 베이징 북경호텔에서 열리고 있는 남북차관급 회담의 취재진으로 출장 중이었다. 남한은 구호물자 전달과 이산가족 문제, 남북 기본합의서 이행 문제를 협의하자는데 반해 북한은 이와는 별도로 비료 20만톤을 선지원해 달라는 요구로 일관해 며칠 째 회담이 결렬되고 있었다. 전날 오전에서야 비로소 첫 당국자들을 회담장 입구에서 촬영할 수 있었다. 그날 저녁 서울 본사 데스크로부터 예상치 못했던 지시가 떨어졌다. 앞으로도 회담이 지지부진할테니, 연변으로 가서 김일성 사후 첫 생일(태양절) 분위기를 취재하라는 것. 낡은 싼타나 트렁크 트림 속에 분리한 렌즈와 카메라를 감추고 국경도로 검문소를 통과했다. 아직도 강가에는 얼음이 낀 을씨년스러운 국경도로를 숨죽이며 돌았다. 두만강변에서 빨래하는 아낙들, 농장에서 일하는 이들, 하루 앞으로 다가온 태양절을 앞두고 협동농장 마당에 모여 회의를 하는 농장원들. 이 모두가 기사가 후드을 열고 차 수리를 하는 척 하는 사이 뒷좌석에서 찍은 사진들이다. 들어갈 때는 모른 척하다가 나올 때 검문해서 숨겨둔 카메라를 찾아내고 돈을 요구하던 검문소 공안들, 국제전화가 안돼 애태웠던 용정 시내 호텔, 베이징으로 돌아온 뒤 다음날 신문에 실린 협동농장 사진으로 인해 동료 기자들과 통일부 언론 담당으로부터 지청구를 듣던 일들이 생생하다. 당시 타사 기자들에겐 레저 기사용 취재를 간다고 둘러댔던 것이다. 지난 달, 베이징 국제공항에서 또 다른 '그'를 만났다. 40대 초반의 그는 한손에 우리 가족 이름을 적은 종이를 들고 있었다. 여행사의 한국인 직원이겠거니 했는데, 그는 자신을 조선족이라고 했다. 하지만 말씨마저 서울말을 닮아 있고, 그의 차 또한 한국의 중형 SUV였으니, 그를 당장 한국 어디에 데려다 놓아도 전혀 이질감을 느낄 수 없을 것 같았다. 17년 만에 달라진 건 도시의 모습만이 아니었다. 17년 전의 '그'와는 천양지차였다. 중국 정부의 관광 정책 덕에 이중언어 관광가이드로 수도에 입성, 부동산 투자에도 성공했고, 아내 역시 전문직 종사자라고 했다. 한달에 열흘 가까이 골프를 즐긴다고도 했다. 중국내 조선족의 위상이 높아졌음을 실감했던 일은 또 있었다. 그가 안내한 조선족 발 마사지 업소에서는 한족, 회족, 몽골족 등이 일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가끔 중국인들을 인솔해서 한국을 가는데, 매력적인 나라라고 눈이 휘둥그레진 다음에 으레 하는 말이 "한국이 아주 큰 나라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는 국가 이미지와 영향력은 영토 크기와는 상관이 없는 것 같다며 얼굴이 상기되기도 했다. 조선족은 중국 55개 민족 중에서 인구수 200만 여명으로 14번째다. 소득과 교육 수준은 이미 오래 전에 한족이나 다른 소수민족들의 수준을 훨씬 넘어섰다고 한다. 이들과 비슷한 인구 200만 여명에 소수계로 살고 있는 우리 미주한인들의 처지가 생각나 반가운 마음이 더 컸다. 아이들 역시 그런 눈치다.